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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과 이규태

펄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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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장의 사진] 41년전의 펄벅여사와 이규태 고문

 

소설 ‘대지(大地)’로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펄벅 여사는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1964년 한국에서 설립돼, 루마니아 필리핀 베트남 등 전 세계 11개국에서 아동관련 복지사업을 벌이고 있는 ‘펄벅재단(1999년 펄벅인터내셔널로 개명)’의 모태는 우리 사회였다. 6·25 전쟁 이후 미국 군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의 불행에 눈감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3년후에는 부천 심곡동에 ‘소사 희망원’을 열었고, 자신이 모은 재산 700만달러 전부를 재단에 쾌척했다.

그녀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60년 늦가을. 조선일보사와 여원사 공동 초빙으로 대구와 부산을 들러 수차례 강연을 했고, 고도(古都)인 경주를 돌아봤다. 지금은 조선일보를 대표하는 ‘글쟁이’가 됐지만, 당시에는 입사 2년차의 풋내기 문화부 기자였던 이규태 고문이 펄벅 여사를 수행, 취재해 11월 8일부터 3회에 걸쳐 ‘펄벅여사 수행기’라는 제목으로 시리즈를 연재했다.

당시 에피소드 한 토막.

경주 여행중 차안에서 바깥을 내려다보던 펄벅 여사가 감나무 끝에 달려 있는 10여개의 따지 않은 감나무를 보고는 문득 “따기 힘들어 그냥 두는

거냐”고 물었다. 이 고문이 “까치밥이라 해서 겨울새들을 위해 남겨둔 것”이라고 설명하자 “바로 그것이야, 내가 한국에서 와서 보고자 했던 것은 고적이나 왕릉이 아니었어요. 이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한국에 잘 왔다고 생각해요”라고 탄성을 내질렀다.

펄벅 여사와 이 고문이 경주를 돌아보다 첨성대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고희(古稀)를 눈앞에 뒀지만 단색 옷차림과 모자를 즐기는 패션 감각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조선일보 장일현 기자 2001.12.29)

●펄벅여사의 '대지'를 심훈은 1936년 4월부터 6회 동안 잡지 사해공론에 번역 연재하다가 요절했음을 기억하는지요.

 

이규태 코너 2004. 4. 27. 이 규태 와의 이야기

 

펄 벅은 한 한식당에서 무채를 보고 "기계로 썬 것 아니냐"고 물었다.

손으로 썬 것이라는 얘기를 듣자 그는 "이건 음식이 아니라 예술" 이라고 했다.

한 초등학교에서 어린 학생이 도시락의 콩자반을 젓가락으로 집는 걸 목격하고선 "저건 서커스"라며 감탄 했다 한다.

<조선일보에서

1960년 10월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가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입사 2년차 문화부 기자였던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고문이
펄 벅 여사의 지방여행을 수행하는 운명을 맞는다.
늦가을이었다.

덜컹 거리는 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펄 벅 여사가 이 고문의 무릎을 내리치며 "저거 보라 !"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전북 장수가 고향인 이 고문에겐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풍경이었다.
지게에 볏단을 짊어진 농부가 볏단을 실은 소 달구지를 끌고 가는 장면.
"농부도 볏단을 지고 있다니!" 펄 벅 여샤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이 고문은 여사가 조금 "오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같으면 저렇게 하지 않을 거야. 지게의 짐도 달구지에 싣고 농부도
올라탔을 거야.
소의 짐마저 덜어 주려는 저 마음! 저게 바로 내가 한국에 와서 보고 싶었던 모습이었어!"

이제 흥분되기 시작하는 것은 이 고문 쪽이었다.
"엄청난 충격이었지. 아! 사물을 저렇게도 볼 수 있구나!
사물을 새롭게 보는 시각의 중요성을 그때 깨달았고
그 후 "한국 그리고 한국인 읽기"는 그 후 다양한 관점에서 왕성해 질 수 있었다.

 

대지의 작가 펄벅은 일찍이 한국에서 동양적 감성주의를 보고 감탄했다. 지게에 짐을 지고 소달구지를 몰고 가는 농부의 모습이었다. 서양사람이라면 지게 짐을 달구지에 얹고 자기도 타고 가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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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 2010-05-05 11:17:20